평범한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벽이’
11년을 키운 강아지인 구름이가 있었다. 아주 어릴때부터 동물을 좋아했고 동생이 없었던 나는 구름이를 동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다. 그런 구름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을 때 나는 한동안 몹시 실의에 빠져 지냈다. 가족처럼 지내던 구름이의 부재가 못 견디게 슬프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종종 타인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을 때, 어떠한 주관적 판단 없이 그저 내 얘기를 하고 싶을 때, 구름이의 털이 보송한 두 다리를 붙들고 일기쓰듯 하소연 하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구름이는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로 둥그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나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곤 했다.
재현이에게 벽이도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재현이는 5살 때 쌍둥이 여동생인 다현이와 함께 심한 열병을 앓고 머지않아 말끔히 나은 다현이와 달리 병원을 오가다 휠체어에 앉게 되었다. 재현이는 전과는 달리 머릿 속에 있는 생각을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걸 듣는 사람은 기다리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고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의 반응도 그러했고 특히 엄마는 재현이를 늘 보호하고만 싶다. 재현이의 말에 귀 기울여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보다는 안전하게, 편하게 지내기만을 원했고 재현이는 방학때나 학교를 다닐 때나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안방보다 큰 재현이의 방에는 텔레비전, 라디오 등 없는게 없었지만 재현이는 늘 누군가와 대화하며 소통하고 싶었고, 자신을 답답하게 여기며 재촉하지 않고 짜증도 내지 않는 방 한켠의 누르스름한 벽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재현이는 그 벽을 ‘벽이’라고 이름붙여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그러던 중 재현이가 다니는 특수학교의 담임 선생님은 재현이가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하자 연습을 시키기 위해 이따금씩 재현이에게 음식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선생님은 재현이가 혼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타인과 소통하길 바라며 했던 일이지만 어느 날 재현이의 엄마는 재현이가 심부름 중 행인이 재현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몹시 분노하여 재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재현이는 학교에 가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엄마에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말을 하려해도 엄마는 짜증으로 답했다. 그런 재현이에게 선생님은 학교를 가는 사람은 너이기 때문에 네가 엄마에게 말을 해야한다고 타일렀고 재현이는 용기를 내어 벽이에게 말하던 것처럼 엄마에게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낸다. 엄마는 재현이가 말을 그렇게 잘 하는줄 몰랐다며 미안해하고, 재현이는 벽이가 있는 방이 아닌 거실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책을 읽으며 지체장애 특수학교인 보건학교에 실습을 나갔던 때가 떠올랐다. 평소 정기적으로 나가던 복지관에서도, 봉사를 나가던 특수학교에서도 정신지체나 자폐성장애 아이들을 주로 만나다 보건학교에 갔을 때 나는 조금 낯선 느낌을 받았다. 중도의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교실 밖 항시 대기하고 계시는 어머님들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반에는 담임 선생님과 실무원 선생님, 보조 교사인 나까지 있어 수업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어머님들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식사지도가 필요한 점심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 야외수업 시에도 아이들을 챙기러 오셨다. 담임 선생님은 익숙한 일인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길뿐 그 상황을 편히 여기시지는 않는 듯 했다. 내가 보기에 그때 우리반 아이들은 뇌성마비와 정신지체, 자폐 등 여러 가지 장애를 동반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공통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조금만 도움을 주면 몇가지 과제를 수행하고 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어머님들의 과잉 보호 속에서 아이들의 시간이 아기였던 때에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재현이 또한 휠체어를 타고 나갔을 때,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설음에 당황했을 것이지만 이내 적응하고 곧잘 심부름을 해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온 음식을 반기고 맛있게 먹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보며 혼자 무언가 해내었다는 뿌듯함에 또 심부름을 가고 싶어진 것이다. 재현이는 성취감을 느낀 것이고 이는 자신감이 되어 재현이가 심부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도전을 할 때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어머님들이 우리 아이들을 어딘가에 보냈을 때, 그것도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이들이라면 불안감은 더 커지고 아이를 안전한 자신의 영역 안에 두고 싶은 마음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때때로 혼자 두었을 때, 도와주지 않았을 때 우리가 예상했던 바를 뛰어넘은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말이 될 수도 있고,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아이들이 어른들만큼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아는 것이 적기 때문에 틀에 갇히지 않은 놀라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못한다고 여길 때, 무작정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할 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만큼만 보여준다.
우리가 아이들의 ‘장애’라는 이름을 떼고, 그저 보통의 ‘아이’로 바라보고 믿어준다면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처럼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에게 어느정도 자율성을 주고 기다려준다면, 훨씬 우리 보통의 아이들과 소통하기 쉬워지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 장애가 있는 재현이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말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방안에서 벽이와 함께 지내는 일에 익숙해져 가면서 자신 만의 세상 속에 고립되어 가던 재현이. 그런 재현이에게 특수학교 선생님은 전동휠체어를 빌려주면 운전 연습을 시키고,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재현이에게 바깥세상을 보면서 사람과 사회와 소통하는 연습을 하게 한다.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이야기하면서 소통을 시작하는 재현이……
작가는 장애를 가진 아동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도와주고 보살펴야 하는 안쓰러운 존재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아이의 존재 차제를 인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던 시선에 대해서 되짚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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