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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한씨연대기/삼포 가는 길/섬섬옥수/몰개월의 새


▣ 황석영,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이 지은 「삼포 가는 길」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영달과 정씨는 이리저리 떠도는 노동자이고, 백화는 시골 출신의 술집여자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나 기차역까지 동행한다. 영달은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기차역으로 가고, 도시 노동자 생활에 지친 정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간다. 이런저런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산 백화 또한 고향 열차에 몸을 싣기 위해 기차역으로 간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농민은 되지 못하고 도시로 나온 이들이 도시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달리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맨손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삼포’는 정씨의 고향이다. 그렇다고 삼포를 꼭이 정씨의 고향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 삼포는 세 사람의 고향이기도 하고, 도시에서 가난하게 사는 노동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삼포로 이들은 과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이 질문에 답해보련다. 1. 영달이 정씨에게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새벽녘에 나는 밥집에서 달아났습니다. 공사판 일거리가 끝나기도 했지만, 밥집 청주댁과 바람이 난 걸 그만 남편 천씨에게 걸려서 도망친 날이었어요. 당신은 한눈에 제가 천씨네 집에 있던 사람이란 걸 알아봤습니다. 저 역시 가끔 당신을 공사장이나 마을 어귀의 주막에서 보았지요. 저를 대하는 당신의 시원시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 기차역까지 동행하기로 한 것이지요. 당신은 고향 삼포에 간다고 했습니다. 십 년 전에 떠난 집=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당신을 저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요. 삼포는 바닷가에 있는데, 바닷가에서도 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이지요. 도시 생활만큼 사람의 마음을 황량하게 만드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요. 고향으로 간다는 당신의 말을 듣고 저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놓인 제 신세가 서럽기만 했습니다. 당신은 삼포가 남쪽 끝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 열 집 정도 사는 정말로 아름다운 섬이라고도 했지요.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가고, 고기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향이 있는 이는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여기저기 떠돌며 이런저런 여자와 살림을 차리기도 했지만, 떠돌이들끼리 만나 같이 사는 게 어디 쉽겠어요. 돈이 있으면 잠깐 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이내 헤어지는 생활이 반복되었지요. 읍내 식당에 들러 요기를 한 우리는 철도가 닿는 감천을 향해 이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길옆은 개천과 자갈밭이었고 눈이 한 꺼풀 덮여 있어 뒤를 돌아보면 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줄기차게 따라왔지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소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 등을 보았습니다. 마침 읍내 식당에서 ‘백화’라는 이름의 술집여자가 도망쳤다는 얘기를 들은 차였지요. 과연 소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는 여자는 백화였습니다. 우리를 보고 대뜸 상욕을 하는 그녀에게 저는 주인아줌마가 잡아오라고 했다는 말을 은근히 흘렸지요. 백화라는 여자는 도통 겁이 없었어요. 하긴 술집에서 온갖 사내들을 만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가 지나가는 남자 둘을 만났다고 겁을 먹을 리는 없겠지요. 저는 한없이 을러대는 그녀의 말을 입을 벌린 채 들어야 했고, 당신은 그런 저를 보며 웃음을 참느라 자꾸만 송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요. 백화도 당신처럼 집에 간다고 했습니다. 고향이니, 집이니 하는 말이 왜 이리 정겹게 들리는지요. 당신은 십 년 만에 집에 간다고 했고, 백화는 삼 년 만에 집에 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달아나는 신세이면서도 백화는 씩씩했어요. 백화는 스물두 살이라고 했습니다. 소매가 해진 헌 코트에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었고, 물에 불은 오징어처럼 되어버린 낡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습니다. 저런 모습으로 그녀는 혼자서 눈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한 마디를 하면 백화는 두 마디를 했어요. 백화의 입담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지요. 눈길 고랑에 빠져 발이 삔 백화를 제가 업고 걸은 거 기억나세요? 백화는 어린애처럼 가벼웠습니다. 술집 생활에 몸이 상한 것이겠지요. 대전에서 만난 옥자가 생각나서 저는 눈시울이 화끈했습니다. 저 같은 놈에게도 순정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어려울 때 만나 서로 살 비비며 산 시간을 어떻게 쉽게 있겠어요. 그렇게 우리 셋은 기차가 서는 감천 읍내에 도착했습니다. 백화는 전라선을 타고, 당신은 호남선을 탄다고 했지요. 당신은 백화에게 여비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백화는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고 가면 된다고 했지요. 팥시루떡으로 배를 채운 후 역으로 가면서 백화는 저에게 고향에 함께 가자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당신이야 삼포로 가면 되지만, 저는 갈 곳이 없으니까 백화를 따라갈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백화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백화가 촌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백화는 본명이 이점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웃고 있었지만 젖은 눈을 감출 수는 없었지요. 저는 당신을 따라 삼포로 가기로 했습니다. 삼포에 일자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의 고향인 삼포를 저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비옥한 땅이 남아돌아가고,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곳에 가면 삶에 지치고 지친 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요. 백화를 보내고 우리는 대합실 나무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쯤 잤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당신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지요. 제 고향도 아니건만, 저도 당신을 통해 고향으로 가는 푸근한 마음을 느끼려고 했습니다. 당신 옆에 앉은 노인이 우리 행색을 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삼포라고 하니 노인은 아들이 그곳에서 불도저를 끈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매는 데서 불도저를 끌다니! 노인이 측은한 눈빛으로 당신에게 몇 년 만에 고향에 가는 거냐고 물었지요. 십년이라는 말을 들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삼포는 육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다에 방둑을 쌓고, 트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는 말을 덧붙였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을 짓던 당신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 있던 나룻배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나면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당신은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인데, 바람결을 따라 들려오는 풍문은 참으로 낯섭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제가 한 마디 했지요.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라고요. 농담인 듯 진담인 말이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당신은 굳은 얼굴로 기차에 올랐습니다. 당신이나 저나 고향을 잃은 점에서는 똑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거지요.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가리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기차를 탔지요. 백화가 며칠도 있지 못할 고향에 굳이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참으로 살기가 힘든 시절입니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마냥 힘들기만 합니다. 지금 당신은 삼포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 술독에 빠져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요? 고향을 잃고 한없는 상실감에 울고 있을 당신에게 위로 한 마디 할 수 없는 제 신세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2. 백화가 영달에게 하필이면 소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오줌을 눌 때 당신을 만났네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투덜댔지만, 어찌나 창피하던지. 상욕을 툭 내던지는 저를 당신은 찬샘에서 뺑소니친 여자라고 했지요. 가슴이 뜨끔했어요. 저는 이판사판으로 대들었지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등을 두루두루 거친 여자였으니까. 입을 벌린 채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는 당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이기도 했네요. 집에 가고 싶었어요. 남자들 등살에 시달리며 번 돈은 한 푼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가진 건 몸밖에 없는 여자가 다른 곳에 간들 제대로 살 수나 있겠어요.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고향에 돌아가도 달라질 게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열여덟에 가출해서 이제 스물두 살이 되었으니, 고향을 나온 지 사년이 되어가네요. 어디 가서 여승이 돼도 이보다는 편할 거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저도 기차가 서는 역에 가는 길이어서 당신과 동행하게 되었지요. 아, 정씨 아저씨도 있었네요. 삼포로 간 그 아저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우리가 걷는 산골 마을은 참 적막했어요. 눈 덮인 들판 위로 물오리떼가 내려앉았다가는 날아오르곤 했지요. 여행길에 이런 풍경을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더군요. 폐가에서 당신은 이런저런 것들을 모아 불을 피웠지요. 불을 피운 폐가는 저에게 이제 막 도착한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어요. 눈물을 흘려가며 불을 피우는 당신을 보며 저도 모르게 “댁에…… 괜찮은 사내야.”라는 말을 내뱉었지요. 분위기에 들떠 저는 ‘갈매기집’에서 만난 남자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군 죄수들을 가둔 감옥이 있던 곳이었는데, 삭막한 삼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네요. 죄수들은 간혹 마을 제방공사를 돕기 위해 마을로 나왔는데, 저는 그들 중 얼굴이 해사한 죄수에게 담배 두 갑을 쥐어주었지요. 작업을 나온 그들은 기를 쓰고 담배를 찾았거든요. 작업하는 열흘 간 저는 그들에게 담배를 댔어요. 그 어려 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어주곤 했지요. 음식을 장만해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가기도 했고요. 말 그대로 옥바라지를 한 셈이지요. 옥바라지 두 달 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저를 만나러 왔어요.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그는 전속지로 떠났지요. 또 만난 적이 있냐고요? 흘러가는 물을 억지로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습니다. 그 사람처럼 한두 달 옥바라지하다가 떠나기 전날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요. 그리고는 끝이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혹 모르지요. 그들 중 누가 같이 가겠느냐고 했으면 따라나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요. 술집 생활을 하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남자 마음이란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들은 외로웠던 게지요. 남자들 외로움을 사랑으로 착각할 만큼 제가 그리 순진하지도 않았고요. 폐가를 나와 길을 걷다가 당신이 문득 저에게 집에 가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지요. 저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지요. 집은 가난하고, 부양해야 할 동생들은 많았으니까요. 하이힐을 신고 어두운 눈길을 걷다보니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그만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버렸지요. 일어서려니 발목이 시큰했어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내뱉었지요. 당신이 달려들어 저를 들쳐 업었어요. 싫다고 뿌리치긴 했지만 마음까지 그러지는 않았지요. 감천 읍내에 오는 내내 당신은 저를 업느라, 옆에서 부축하느라 참 고생했지요. 저는 전라선을 타고 정씨 아저씨는 호남선을 탄다고 했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었어요. 고향에 가면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는 건 핑계였지요. 정씨 아저씨가 같이 가라고 당신 등을 떠밀었어요. 어찌나 고맙던지. 대합실 한쪽에서 당신은 정씨 아저씨와 말을 주고받았지요. 저는 불안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았어요. 역시, 당신은 정씨 아저씨와 함께 삼포로 간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는 기차표와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내밀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지요. 이런 마음으로 남자를 대한 게 얼마만인지. 개찰구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어요. 하루 만에 어찌 이리 정이 들 수 있는 걸까요. 개찰구로 나갔다고 저는 다시 당신에게 왔지요.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당신도 보았을 거예요. 마음으로는 당신을 따라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다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본명을 말해주는 거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요. ‘이점례’가 제 본명이었거든요. 참 촌스러운 이름이죠. 촌에서 태어나 농사짓는 촌 여자로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가지 않은 길은 늘 마음 한쪽에 깊이 자리하는가 봐요. 당신이 준 기차표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제가 고향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농사를 지어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정말로 모르겠네요. 사람들 말마따나 며칠 만에 고향을 뛰쳐나와 다시 도시로 휩쓸려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혹, 당신도 그래서 저와 함께 가는 길을 거부한 것은 아닌지요. 당신이 제 말을 따랐다면 당신과 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겉으로는 한없이 거칠어 보여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당신은 행동으로 보여주었지요. 거친 마음이야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 어쩌겠어요. 돈 많다고 으스대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저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어요. 하긴 그들 입장에서 보면 저야 돈으로 하룻밤을 산 물건에 불과하니 뭐라 말하기도 그러네요. 정씨 아저씨와 함께 간 그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고향 이야기를 할 때면 정씨 아저씨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더라고요. 그만큼 정씨 아저씨도 도시 생활에 지친 거겠지요. 당신이야 시간이 흐르면 삼포에서 나오게 되겠지만, 정씨 아저씨는 다시 찾은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를 하니 다시 씁쓸해지네요. 저는 이 집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3. 정씨가 영달에게 천가네 밥집에서였지. 자네와 바람을 핀 청주댁은 죽지 않을 정도로 천가에게 얻어맞았어. 자네는 밤에 몰래 밥집에서 도망 나왔고,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했지. 그런 주제에 자네는 남편에게 맞은 여자 걱정을 하더군. 그래서일 거야, 기차역까지 동행하자는 자네의 말을 선뜻 받아들인 게. 새벽 눈길을 혼자 걷는 일도 재미없기도 하고. 나는 고향 삼포에 가는 길이었지. 자네는 정해진 곳이 없었고. 도시에서 생활을 할수록 나는 삼포가 더 없이 그립기만 했어.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갔고, 고기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참으로 살기 좋은 땅이었지. 그런데, 왜 나왔느냐고? 그게 참 젊은 나이에 섬에 갇혀 산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밖에 나가면 이곳이야 쉽게 잊을 줄 알았지. 아름다운 섬이라는 거 빼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길을 가다가 술집에서 도망친 백화라는 아가씨를 만났지. 말은 거칠어도 참 괜찮은 여자였어. 자네에게 반해 고향에 같이 가자는 말도 했지 아마. 나는 자네가 그 여자를 따라가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 사람 인연이란 게 서로 정 붙이고 살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자네도 백화를 괜찮게 생각하는 듯싶기도 했고. 자네는 나를 따라 삼포에 가겠다고 했지. 그리고는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기차표와 빵과 찐 달걀을 샀어. 백화에게 주기 위해서였지. 참 안타깝더군. 백화를 업고 눈길을 걸어온 일도 그렇고, 자네는 분명 백화에게 별다른 마음을 품은 게 분명했는데도, 같이 가려고 하지 않는 게. 여자 눈에 고인 눈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네. 사람 인연이라는 게 무언지 참. 백화를 보내고 둘만 남았을 때 자네는 저런 애들은 고향에서 사나흘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지. 나도 고개를 끄덕였어. 자네나 백화에 비한다면 나는 마음 편히 돌아갈 고향이 있어 좋기만 했지. 그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노인을 미리 만난 게 다행인지도 몰라. 삼포가 공사판이 된 상황을 모른 채 고향에 갔다면 어땠을까? 노인에게 삼포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네. 내가 왜 그 끔찍한 도시 생활을 청산할 마음을 먹었는지 아는가? 마음속에 아름다운 삼포가 자리하고 있어서네. 돈 한 푼 없어도 굶어죽지 않을 곳이 삼포였네. 그런데, 그런 삼포가 지금은 도시처럼 변해가고 있다니, 나는 도대체 또 어디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고향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 떠날 수도 있겠지. 바닷가 마을에 가서 고기를 잡으며 살 수도 있겠고. 하지만 고기를 잡는다고 고향인 것은 아니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삼포에만 묻어 있으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라는 노인의 말이 생각나는군. 나는 하늘을 잊은 대가를 고스란히 받고 있네. 고향 없이 사는 자네가 참으로 부럽구만. 하긴 고향 없이 사는 자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허전한 마음이 있겠지. 마음에 드는 여자와 만나도 함께 살 수 없는 신세야 나도 쉽게 이해가 되고. 공사판이 된 삼포에서 자네와 내가 살게 될 삶이야 뻔하지 않은가. 몸으로 세상과 부닥치며 살아야겠지. 도시에서 살아온
분단과 산업화로 인한 파행과 박탈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린 황석영의 대표작 다섯 편을 엄선해 수록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쟁의의 현장을 최초로 형상화한 「객지」, 전쟁과 분단으로 남과 북 모두에서 희생되는 한 양심적 의사의 역정을 그린 「한씨연대기」, 베트남전 파병을 앞둔 병사들과 술집 작부 간의 애틋한 연대감을 그린 「몰개월의 새」,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삶의 터전을 상실한 부랑노동자를 형상화한 「삼포 가는 길」, 중산층의 삶을 다룬 「섬섬옥수」 등이 실려 있다.

간행사

황석영: 객지 / 한씨연대기 / 삼포 가는 길 / 섬섬옥수 / 몰개월의 새

이메일 해설: 임송본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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